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루기로 했다. 하동이라는 거리가 멀기도 하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싶어서 였다. 또한,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야 친인척과의 왕래가 잦았지만 돌아가신 후로는 거의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번잡한 장례식장 보다 가족들과 이야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는 어머니와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데 .. 예기치 않게 시골 중학교 동창들이 왔다. 연락하지도 않았는데, 생각치도 못한 조문에 진심으로 고마움이 느껴졌다. 여하간, 장례는 잘 치뤘다. 울산 자형의 울음이 무척이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우리 한서방'하고 참 좋아했는데 ..
[떠나는 순간을 위한 준비]
친구가 말했다. "너는 '준비'를 잘 해 왔구나."
그런가?
떠나야 할 당신도 준비를 잘해왔겠지만
보내야 하는 사람도 준비를 잘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산책을 위한 차림에
의자에 앉아 가셨다니 말이다.
그래서 슬픔보다는 평온한 3일을 보냈다.
그날 아침,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의 모습,
당신과 한평생 싸우고
정들며 살아왔던 먼저 가신 아버지,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당신의 팔 남매 자식들,
그날 오후에 내려온다고 한 자식..
너무 많나?
(그렇다. 그 짧은 시간에 생각하기엔 너무 많다.)
아마 내 생각으로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온 종일 함께 보내온
동네 할머니들의 모습을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만나는 할머니마다 눈물을 보이셨다.
한두 살 차이의 언니 동생들이었던 할머니들
시집와 70년을 한 동네에서 살아왔던 분들이라
'잘 됐다'라고 말하면서
돌아서 가는 모습이 먹먹하다.
당신을 보내고 시골집으로 왔다.
당싱이 유년을 보냈던 16년의 집,
당신이 자식들을 키우며 살았던 36년의 집,
당신이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25년의 집,
은행나무와 살았던
10년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앉았던
그 자리에도 앉아 보았다.
그날 밤,
당신이 남긴 팔 남매 자식들
하나하나의 추억을 적은 일기장을 보며,
어렸을 때의
먼 기억들을 끄집어 내기도 하고,
까마득히 잊혀 갔던
기억을 다시 담기도 했으며,
생전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소홀했던 지난 시간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나도..
이제부터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이 모두 행복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죽을 준비' 해야 하는
나이가 된 듯 하다.
2017.05.02
아콤파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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