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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이론/경영관리

인디언 마지막 수우족 추장 시팅볼

시팅불


“백인은 식량을 얻기 위해 땅 파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부족은 조상이 했던 것처럼 버펄로 사냥하는 것을 좋아한다. 백인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부족은 사냥터를 따라서 티피(인디언의 이동식 숙소)를 이곳 저곳에 이동하며 살길 원한다. 백인은 노예의 삶을 살아간다. 이들은 마을이나 농장에 갇혀 있다.

 

우리 부족이 원하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다. 백인의 집이나 철도 또는 옷이나 식량, 그 어떤 것도 나는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방식대로 광활한 대지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1883년 5월 10일, 앉은황소의 연설 중에서)

 

 

1876년 6월 25일,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뜨거운 날이었다. 리틀빅혼 강을 끼고 자리한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훙크파파 부족의 추장 앉은황소(Sitting Bull)의 지휘 아래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었다. 여자들은 티피에서 집안일에 몰두했고, 새벽녘까지 축제를 즐겼던 사내들은 낮잠을 잤다. 정오가 되어 평화를 깨뜨리는 소식이 마을을 강타했다. “적들이 오고 있다, 적들이 오고 있다!” 강 동쪽 절벽에 있던 여인들이 리노 샛강에서 달려오는 기병대를 본 순간 모든 진영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남자들은 서둘러 전투복장을 갖추고 말을 찾았다.

 

 

적장은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으로 남북전쟁에서 빛나는 전과를 기록한 장수였다. 그는 샤이엔족 마을을 습격하여 인디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커스터는 마커스 리노 소령과 1개 대대 병력씩을 나누어, 리노는 아래쪽에서 커스터는 위쪽에서 마을을 습격하기로 했다. 커스터는 미군 기병대가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인디언들이 겁을 먹고 도망갈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오산이었다. 마을에는 노련하면서도 덕 있는 싸움꾼 앉은황소가 있었고, 용감무쌍한 그의 조카 흰황소(White Bull)와 한마리황소(One Bull)가 있었다. 부녀자들은 속히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고, 전사들은 즉시 전투에 임했다. 검은 말에 오른 앉은황소는 전사들을 독려했다. “나가 싸워라. 용기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힘을 내라!” 앉은황소는 숲 근처 도랑에 남아서 미군에게 총격을 가했고, 용맹한 젊은이들이 더욱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글라라 부족의 전사 미친말(Crazy Horse)의 가세는 인디언 전사들의 사기를 크게 높여주었다.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미군은 적잖이 당황했고, 인디언의 기세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다. 마침내 인디언들은 쓰러진 적장을 발견했다.

 

나흘째 밤 인디언들은 승리의 춤을 추었다. 수우족과 샤이엔족의 역사에 없었던 대승리였다. 제7기병대의 연대 병력 절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인디언의 경우는 27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장 커스터의 패배와 죽음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역으로 적장 앉은황소는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 언론은 앉은황소를 나폴레옹과 비견되는 천재 전략가로 묘사했다. 그러나 리틀빅혼 전투에서 앉은황소가 발휘한 것은 탁월한 전투력이나 용맹성, 빼어난 전술전략이 아니었다. 그는 현명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부족 연합을 단단하게 유지함으로써 적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무력화했던 것이다.

 

 

앉은황소는 인디언에게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수우족의 세 개 부족그룹의 하나인 라코타족은 용맹성, 인내심, 관용, 지혜 등 네 가지 덕목을 매우 중시했다. 특히 추장에게는 이러한 덕목이 더욱 강하게 요구되지만, 네 덕목을 고루 갖춘 인물이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앉은황소야말로 네 가지 덕목을 고루 갖춘 이상적인 추장이었다.

 

앉은황소, 즉 ‘타탕카 이요탕카’(또는 타탕카 이요타케)라는 이름 자체가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있는 끈기 있는 황소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그가 용맹성보다는 인내심이나 관용, 지혜에 더 가까운 인물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별명이 ‘느린애’였다는 것도 그가 인내심 강하고 끈기 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사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용맹성이었다. 느린애는 열네 살의 자신이 얼마나 용감한지를 부족민에게 몸으로 보여주었다. 부족이 크로우족 영토와 경계한 곳에서 야영할 때였다. 전사 한 명이 크로우족의 말과 가죽을 얻기 위해 전투부대를 조직했는데, 느린애가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어린 소년은 자신이 있었다.탐색을 나간 지 3일 만에 훙크파파족 전사들은 말을 탄 크로우족 열 명을 발견했고, 도망가는 크로우족을 느린애가 달려가 도끼로 제압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에 흰 독수리 깃털 하나를 꽂아주었다. 첫 번째 타격의 표시였다. 아버지는 또 자신의 이름 ‘앉은황소’를 물려주고, 자신은 뛰어오르는황소(Jumping Bull)가 되었다.

 

앉은황소는 인디언 전사 중 엘리트 모임인 ‘한밤중 강한 심장’(Midnight Strong Heart)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분쟁이 있으면 그는 현명한 중재자가 되었고,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해결사가 되었다. 그는 모든 일에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말 타는 솜씨는 완벽했다. 그는 안장이나 고삐 없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몸을 날릴 수 있었으며, 말 옆구리에 바짝 붙어 화살을 피하고, 두 손으로 말갈기를 잡고 두 다리로 몸통을 잡은 채로 숨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이런 자세로 화승총이나 권총도 쏠 수 있었으니, 그의 야전에서의 전투기술은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겠다. 들판을 누비며 다진 그의 몸매는 나이가 들수록 우람해져, 키는 180센티미터에 달했고 넓은 가슴과 커다란 두상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품격을 강화시켜주었다.

 

 

용감한 것 못지않게 인디언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능력이었다. 앉은황소는 꿈과 환영 속에서 미래를 보고 예언할 수 있는 영매 기질이 다분했다. 이런 능력으로 위차사 와칸(Wichasa Wakan), 즉 ‘신성한 의식을 수행하는 남자’가 되었다. 위차사 와칸은 마을의 정신(종교)적인 지도자였다. 문무와 영적인 능력을 겸비한 앉은황소는 인디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지도자였다. 백인들이 훙크파파의 수렵구역에 침입하자 가장 용감하게 싸운 이도 앉은황소였으니, 1869년 그는 마침내 수우족의 대추장으로 추대되었다.

 


1870년대 블랙힐즈에서 금이 발견되자 미국은 인디언 영토인 수우족 보호구역을 점령하고자 했다. 미국은 1875년 말 모든 수우족들에게 이듬해 1월 31일까지 보호구역으로 이주해야 하며, 이를 거부하면 미국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물론 앉은황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지 크루크 장군이 인디언과 전투를 시작했고, 미국으로서는 믿었던 커스터 중령의 부대가 궤멸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후에도 미군은 앉은황소가 이끄는 수우족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했다.

 

수우족에게 문제는 미군과의 전쟁이 아니었다. 수우족의 주요 식량이자 생활필수품을 제공해주는 자원이었던 버펄로가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최대 위기였다. 미국의 개발정책이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굶주림과 미군의 계속되는 공격에 지친 앉은황소는 1877년 캐나다로 이주하게 된다. 캐나다에서 앉은황소가 백인 중에서 가장 신뢰했던 인물 제임스 월시 소령을 만나기도 하나, 캐나다 정부마저 인디언 때문에 미국과 외교적인 갈등을 빚게 되자 나중에는 앉은황소를 배려하지 않았다. 앉은황소를 따르는 무리들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는 부족민들을 굶주림과 헐벗음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881년 7월 20일, 몬태나의 부포드 요새에서 앉은황소는 굴복하고 만다. 앉은황소는 어린 아들 까마귀발에게 장총을 주어 미군에게 전달했다.

 

이때 그가 남긴 말은 사뭇 감동적이다. “나는 어린 아들을 통해서 이 장총을 양도한다. 이제 나는 어린 아들이 미국인의 친구가 되었음을 알리고 싶다. 나는 내 아들이 백인의 습관을 배우고 백인 아이처럼 교육받기를 원한다. 내 총을 양도한 마지막 인디언이 나라는 사실을 아들이 기억하길 바란다.”

 

 

앉은황소는 인디언이 인디언의 생활방식대로 사는 것을 원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백인들에게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1888년 수우족 법안은 ‘수우족 보호구역’을 선바위와 샤이엔 강 등 6개의 보호구역으로 분리하고, 각 보호구역은 거주민 모두에게 토지를 할당하는 데 필요한 토지 총량을 배당 받는다고 규정했다. 남은 토지는 정착민들에게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앉은황소는 격렬히 반대했다. 농장을 개인에게 분배하면 부족의 결속력이 약해지고 전통 생활방식이 심대하게 훼손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교사 메리 콜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부족민이 백인과 멀리 떨어질수록 더 크게 만족할 것이다. 백인은 사악하다. 나는 우리 부족의 여자들이 내가 본 백인 여자들처럼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우리 부족민에게 쓰고 읽는 법을 가르치길 원한다. 하지만 백인처럼 되면 안 된다.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며, 나 역시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수우족 법안마저 지켜지지 않았으니, 인디언을 위한 배려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 정부는 쟁기와 일소, 통나무집, 학교, 기독교 교회를 인디언 보호구역에 제공하여 유목민이자 전통 종교를 믿는 인디언을 농경민이자 기독교인인 미국인으로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전통을 하루아침에 버려야 하는 인디언에게 미래는 암담한 것이었다. 그런 인디언에게 먼 곳에서 구원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파이우트족의 워보카라는 사람의 특별한 예언이었다. 그의 예언은 믿음(정통 인디언 신앙과 기독교의 혼합)을 갖고 유령춤(Ghost Dance)을 추면 인디언은 행복한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 땅은 백인이 없는 땅, 이미 사망한 모든 인디언도 함께 사는 땅, 사냥감 등 물자가 풍부한 땅, 질병과 고통이 없는 땅, 모든 부족이 평화롭게 사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앉은황소를 비롯한 수우족은 워보카의 교리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네바다 주에 다녀온 차는곰(Kicking Bear)의 말을 들은 뒤에는 보호구역의 모든 인디언이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거대한 새 천년의 지각변동은 백인을 모두 거대한 흙 속에 묻어버릴 것이며, 유령춤을 믿고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는 인디언 신자를 높이 올릴 것”이라는 예언은 인디언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였다. 인디언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는 유령춤의 열풍을 끄기 위해 백인들은 그 주동자로 앉은황소를 지목했다. 1890년 12월 15일 앉은황소는 배신한 인디언 경찰들에게 살해당했다. 안타깝게도 열네 살 소년인 그의 아들 까마귀발도 그날 죽었다. 앉은황소가 친애했던 캐나다의 제임스 월시는 앉은황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앉은황소보다 위대한 인디언은 없었다고, 그야말로 수우족의 진정한 선지자였으며 법이요 왕이었다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방인이 원주민의 땅과 권익을 빼앗는 역사가 오랫동안 되풀이되어왔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가 그 중 가장 가까운 예이다. 지구의 땅과 바다와 하늘을 누구의 소유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먼저 정착한 원주민의 권익이 보호받아 마땅하거늘, 역사는 늘 침략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은 인류가 가장 근래에 확인한 가슴 아픈 약탈의 땅이다. 그나마 독특한 공동체적 삶을 구축했던 인디언 부족의 행복했던 삶이 뒤늦게라도 조명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수우족의 대추장이었던 앉은황소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위대한 인물이었다.

 

로버트 어틀리는 앉은황소에 대한 전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참다운 의미에서의 인디언이었고 진정한 인디언이었으며 자신의 전통 문화에 완벽하게 충실한 문화의 수호자였다. 그는 훙크파파 족의 위대한 애국자였으며, 부족이 존중하는 가치관의 원칙과 제도에 언제나 성실했다. 이러한 점에서, 앉은황소의 삶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디언이 추구한 이상적인 삶의 가치를 오늘의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