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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춘추전국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고, 나아가지도 말라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고, 나아가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어떨까? 사상과 철학은 이미 멀어지고 기회주의에 익숙해진 우리들,

이 영화를 보며 내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해본다.

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치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 본다. 그 답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

 

공자라는 영화는 공자를 통해 그의 정신 세계와 집념을 현대인에게 일꺠워주기 위한 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노정공'은 공자를 등용하여 왕권의 부할을 꾀하지만 혼란의 시대에 그는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다. 주변국을 떠돌다 다시 돌아온 공자는 처음과 떠날때와 같이 절을 하는 그의 모습에

한결같은 정신세계의 위대함을 배워본다.

 

강렬한 액션을 원하는 영화팬에게는 지루한 영화일 수 있지만,

삶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영화이다.

나는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고등학교 때 본 주연발, 그의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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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를 주된 연구의 근거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論語}를 보면 공자가 호감가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공자의 적대자들이 가한 공격에도 이 인상과 상충되는 내용은 없다. {論語}에 의하면 [공자는 閉居 할 때면 격의없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으며], 또 [온화하지만 당호하였고 , 위엄이 있었지만 사납지 않았으며, 공손하였으나 편안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아첨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할 경우에는 경의를 표하였 으며, 그 대신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존경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일정한 위치가 있었 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는 물론 미천한 사람들에게조차 고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자가 항상 수많은 친구들로 떠들썩하게 둘러싸여 있는 型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변함없는 친구가 많았지만 크게 인기를 모으는 型은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생각이 깊었고 솔직하였으며 [원망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을 숨긴 채 친하게 지내는 것을 ......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대개의 경우 그는 면전에세 사람을 비판하고 뒤에서는 칭찬하는 원칙을 따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존경은 받지만 인기는 끌지 못하는 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다소 과묵한 편이었다. 이 태도는 자기 아들에게도 적요 된 것 같은데, 그는 자기 아들의 능력에 실망하였음을 솔직이 인정하였다. 그는 예의가 발랐으나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위신을 손상하는 짓으로 생각하였다. 군주나 권세 있 는 세습귀족들과 말할 때도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몹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식의 처세가 실제 현명한 것이었느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의 교훈인 엄격한 성실성과는 일치한다.

그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을 혐오하였다. {논어}만 보아도 공자가 多辯家가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지만 맹자도 [나는 話術에는 재능이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공자의 말에는 때때로 감동적이고도 고상한 것은 있지만, 장황하거나 화려한 것은 거의 없다.
다른 면에서도 그는 겉으로만 꾸미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였는데, 이것은 세상에 너무 닦인 사람보다는 소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이다.
공자는 육체적인 안락과 부는 진정한 군자가 추구할 목표가 아니라고 믿었다. [선생께서는 만약 부 가 정당한 추구의 목표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으며, 채찍 을 잡는 마부라도 되겠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겠 다.] 이것으로 공자가 금욕주의자였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진 정한 금욕주의자는 보통 쾌락 자체를 죄악시하고 고통을 선으로 생각하기조차 하는데 공자에게는 이러한 요 소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으로서의 유교는 절제 있는 육체적 쾌락을 반대한 적이 없으며, 공자 자신도 덕과 성실에 배치되지 않는 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쾌락의 원천으로 서 학문을 찬양하였으므로, 순전히 향락을 목적으로 공자가 음악을 즐긴 것은 예외적인 것이다. 쾌락이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인생의 필요한 일부라는 심원한 심리학적인 진리를 인식한 점에서 유교 는 고대 중국의 주요 철학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문명의 전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 진지하였기 때문에 부당한 비판에도 성내지 않고 미소로써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전지전능한 척하지 않았으며 어는 학자에게도 불가결한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지식을 얻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무식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제자들이 그와 의견을 달리하였을지라도 그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치 않았다. 자신이 거창한 사명을 띠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 은 평판보다 공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공자는 항상 주장하였지만, 때로는 친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이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할 정도로는 세상의 평판에 관심을 가졌다.

또 그는 인정도 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공자는 맹인을 접대하였을 때, 그 눈먼 손님에게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소개하였으며 그 손님이 호기심은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모두 알려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정이 많아 자기 재산보다는 사람의 안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마굿간 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고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으 며] 들어세 사냥을 할 때도 [낚시는 하였지만 그물은 사용하지 않았고, 주살을 던졌으나 앉은 새는 쏘지 않 았다.] 이 비범한 인물에 대해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학감각을 가진 열정하였다는 점 일 것이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자주 농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는 일이 잦았음에는 틀림없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금방 이해되지 않는 해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 많다. 그 해학 때문에 경건한 주석가들이 난처한 순간에 빠진 일이 많았는데, 주석가 중에는 농담을 하는 것은 성 인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철저하게 확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크게 빈정거리는 어투로 공자를 이렇게 평한 일이 있었다. 즉 [과연 위대하구나, 공자는! 박 학도 하구나! 그러나 어느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자기가 교사로 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즉시 이 것을 엄숙한 비판으로 인정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무슨 일을 해볼까? 마차를 몰아볼까? 활 을 쏘아볼까? 좋다! 마차를 몰자.]

공자는 자제력은 대단하였지만 초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이란 자제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총애 하는 제자 顔回가 죽었을 때는 슬픔을 억제하지 않았다. 다른 제자가 공자에게 [선생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연 그랬던가?]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을 지나치게 슬 퍼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그렇게 할 것인가?

▶ 인(仁)사상

禮를 수호화기 위해 공자는 도덕윤리의 측면에서 "仁"의 학설을 제시했다. "仁"이라는 어휘 자체는 공자 이전부터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철학범주로서 제기된 것은 공자에 의해서였다. 공자가 내놓은 "仁"은 이후 중국 철학사에서 중요 범주의 하나가 되었다. 『논어』에서 "仁"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안연의 물음 에 답한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禮"와 "仁"의 관계를 개괄하고 공자의 "仁"학설의 기본 내용을 설명해준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 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克己"란 자기 억제이며 "復禮"는 "禮"에 부합되지 않은 언행을 "禮"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克己復禮"를 이룬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어진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안연은 한걸음 더 나아가 "克己復禮"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仁"의 원칙에 부합되는 사람이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禮"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禮"란 주례이며 동시에 서주 노예제 사회의 등급제도인 것이다. 이로써 공자가 제시한 "仁"이란 일종의 도덕원리를 이용하여 "君子"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 하는 모든 것을 자제케 하고 이들이 주례의 등급규정을 철저히 지키고 예를 범하는 행위를 방지 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당시 통치계급 내부의 귀족 사이에서 주례가 훼손당하고 위를 범하는 혼란과 자기가 섬기 던 임금이나 부모를 죽이는 등의 "無道"한 행위가 예사로이 발생하는 데 대해 유심주의적 관점에 서 그 원인을 살펴, 이를 귀족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보았다. 이리하여 공자는 "仁"을 또한 귀족 사이의 상호관계를 처리하는 도덕원칙으로 삼아 "仁"이란 곧 "사람을 사람함"이라고 강조하였다. 공자는 귀족들에게 자제와 상호협조를 통해 피차간의 모순을 조화시 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자기 억제와 상호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공자는 "仁"을 실행하는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무릇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 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해준다." 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 게 하지 말라"고도 하였다. 이 두 구절의 의미는 자기가 이루고자 원한다면 다른 사람도 이룰 수 있게 해야 하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증삼은 "忠恕" 두 글자로써 "仁"의 이 두 원리를 개괄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본래의 생각과 부합된다. 충서의 도는 공자가 주장한 仁學說의 중심사상을 꿰뚫는 것이다.

공자의 '충서의 도'는 역사적으로 착취계급과 그 대표자들에 의해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인민의 투 쟁정신을 마비시키는 부식제로 이용되어왔다. 이들은 온 힘을 다하여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소위 "용서의 도"를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최고의 미덕"으로 선전하였고 나아가 초계급적인 "인류애" 또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안다"는 식의 "위대한 덕성"을 고취하 는 한편, 이러한 도덕관념을 노동인민에게 적극적으로 부식시켜왔다. 이처럼 저의가 담긴 왜곡된 선전 아래 공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과 남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도덕유형을 만들 려고 한 것 같다. 사실상 공자의 "남"이란 다른 귀족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자나 노예까지 포함하 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다음에서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이는 있 을지라도 소인이면서 어진 사람이란 없다" 또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려 든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공자에게 仁愛의 추구란 통치계급의 일 로서 통치대상인 노동자를 어떻게 지배, 복속시키느냐의 문제일 뿐 무엇이 인애이며 도덕인가를 밝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忠恕란 노예소유주인 귀족들 사이의 忠恕이지 노예소유주와 노예 사이의 忠恕는 결코 아니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착취제도와 착 취자만 옹호하는 것일 뿐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공자로서는 그때까지 다음과 같은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곧 그 자신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더러 노예가 되도록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 자신이 착취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착취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도 않 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대계급 사이에는 "忠恕"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피압박 노동인민으로서 말한다면, 소위 "忠恕"란 철두철미한 기만인 것이다.

공자에게 "復禮"란 "仁"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忠恕의 道"를 실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례에 서 규정한 준칙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거나 "바라지 않는 것"이나를 막론하 고 주례라는 원칙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소위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귀족들에게 주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것을 유구한 것으로 자신의 이익 을 고려할 때는 동시에 다른 귀족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의 목적은 모순을 조화시키고 주례의 구질서를 개선, 유지하는 데 있을 뿐이다. 공자는 당시 두 가지 종류의 소유제에 대한 모순을 반영하는 통치계급 사이의 투쟁을 모두 노예소유주 귀족들 사이의 군신 내 부의 모순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禮"에 의한 제재, 사상적으로는 "仁"의 고취로써 이와 같은 모순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공자가 제창한 "충서의 도"의 역사적 내용이자 계 급적 정체이다. 공자는 결코 모든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착취계급 전부를 사랑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오직 착취계급 가운데 일부분인 노예소유주 귀족에 지나지 않았 다.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의 입장에 서서 "자기가 서려고 하면 남을 서게 해주고 자기가 이루 려고 하면 남이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허풍을 칠 수는 있어도 내가 참월을 생각한다면 남 의 참월도 지지해주고 내가 반란을 꾀한다면 남의 반란에도 공감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이다. 이러한 충서의 도는 공자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다. 일정 계급적 도덕이론은 이 계급의 정치제도에 기여하는 것으로, 공자의 "인"도 "예"에 종속되는 것이다.

공자는 "인"을 "復禮"를 추진하는 일종의 도덕적 동력이자 사상적 근거로 보는 한편, "인"의 실행 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인이 어찌 멀리 있으랴? 내가 인을 바란다면 그 인 은 이미 와 있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자신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행 하려고만 한다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양심이나 자아의식의 산물롤 보 는 것이다. 이러한 유심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공자는 주관적인 도덕동기와 소위 "내성적"인 자아수양의 역할을 크게 내세웠다. 그는 "인의 실천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어찌 남에게 서 비롯되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인"의 실천이 바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자각과 주관에 따른 노력에 의거할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들이 오직 "인"을 실행하고 자각적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주례의 규정을 준수할 수 있으면 "인"의 원칙 이 실현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례 또한 옹호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노예제 사회가 해체되어 봉건적 소유제 사회로 나아가돈 역사적 변혁기에 위치하는 공자의 인에 대한 학설은 한 역사시대의 복잡한 사회모순, 특히 통치계급 상층에서 발생한 모순으로서 분화와 투쟁을 반영한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통치계급의 내부관계를 조정하는 원칙으로서 하나의 도덕범주인 "인"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통치계급 내부에 새로운 위기가 출현했음을 나타내 는 것으로 불가결한 새로운 조치였다. 그러나 공자는 노예제 사회의 종법제도를 옹호하는 반동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덕학설도 위선과 기만적 성질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같은 본질이 일체의 반동계급의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이로써 그는 중국 역대의 반동통치자나 모 든 착취제도의 옹호자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인"의 학설은 역대 봉건지주계급 사상가에 의해 지지, 보완되어 "三綱五常"과 "忠孝節義"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봉건 예교사상으로 발전하여 봉건통치를 옹호하는 냉혹한 사상적 압박도구가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역사상 공자 때까지 "仁 慈"의 의미밖에 없었던 "인"이 봉건지주계급의 독재를 위한 마취제이자 항상 노동인민의 신체를 얽어매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