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실-경영/산업지식

죽은권력 산권력-여의도 박반장 기자의 글

이미지


정치부 박병일 기자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이 끝났습니다. 지난 금요일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기 위해 서울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는 수 십 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광화문 일대가 노란 풍선과 선 캡으로 뒤덮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면서 여권은 착잡했을 겁니다. 낮은 자세로 민심의 동향을 주목해 오던 한나라당은 더욱 가슴 답답했을 겁니다.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할 겁니다. 반면, 지지율 15%대 벽을 넘지 못하고 스스로 분열했던 민주당 등 야권은 '죽은 제갈량이 산 조조 대군을 물리쳤다'며 내심 기뻐할 겁니다. 북한 핵 실험에도 아랑곳 않는 범국민적 추모열기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겁니다. 양측 모두 몸조심 하면서 향후 정국의 향방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백만 조문 열기로 달아오른 오늘의 상황을 냉철하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우선, 여권은 노 전 대통령을 조문한 국민이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점, 영결식 날 서울 시내 거리를 가득 덮은 인파가 수 십 만 명에 달한다는 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해법 모색은 시작돼야 할 겁니다. 그 조문 인파 모두가 이른바 '노사모' 회원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더욱 여권은 상황의 심각성을 회피해선 안 될 겁니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의 정도나 인식의 범위도 다를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수많은 조문 인파를 하나로 묶은 원인 또는 동인이 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겁니다.

(1)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     

노 전 대통령 서거이후 조문객들을 하나로 묶었던 끈이 바로 이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누구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인지, 그 "누구"가 생략돼 있습니다. 어떤 이는 검찰이라고 생각할 것이요, 어떤 이는 법무장관이라고 생각할 것이요, 어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생각할 것이요, 또 어떤 이는 막연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살로 몰게 된 원인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 말 속에는 노 전 대통령을 지켜줬어야 할 주체로 자신을 지목합니다. 결국 지켜주지 못한 주체가 바로 자신이 됩니다. 또 노 전 대통령에게 죄송하다고 느끼는 주체도 자신이 됩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지켜보면서 강한 죄 의식까지 느끼게 되는 겁니다. 앞서 말한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는 그 "누구"에 대한 분노가 맞물리게 됩니다. 청와대와 검찰, 여당과 경찰 등 공권력까지 모두가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분향소와 시청을 가로막은 경찰을 보면서 분노는 적대감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런 조문객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 했던 일반 시민들도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됩니다.

(2) '투신'... 죽은 권력 과 산(生) 권력.

평생 바보 노무현 소리 들어가며 서민의 고통을 대변해줄 듯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동안 1억 원짜리 시계를 선물 받고 몇 십억원씩 받아 자식들의 외국 생활에 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국민들은 그의 변절에 깊은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권양숙 여사나 건호 씨와 정연 씨는, 비뚤어진 모정을 지닌 못난 부인과 아버지를 욕보인 자녀들로 각인됐을 겁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모른 척 인터넷 글을 통해 자신을 구차하게 변호하는 '비겁자 노무현'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투신으로 이런 인식이 일거에 바뀝니다. 도저히 이유를 헤아리기 힘든 노 전 대통령의 자살 선택에 '인식 혼돈'의 시기를 거쳐 '동화'의 시기로 전환됩니다. 흔히, 목을 매거나, 약을 먹거나 하는 형태의 자살은 내적인 소외에 대한 표출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항변, 저항은 투신 자살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남상국 사장이 그랬고, 정몽헌 회장이 그랬습니다.     

이른 새벽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긴 채 부엉이 바위에 홀로 올라가 절벽 아래로 자신의 몸을 던진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앞서 말했던 '비겁자 노무현'으로 생각했던 일반인들이 뭔가 '오해'한데 대해 미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를 죽음으로 '내 몬' 원인을 찾게 합니다. 살아있는 권력에 의해 극단으로 내몰린 죽은 권력으로 인지하게 됩니다. 못난 부인이나 아버지를 욕보인 자녀로 한때 각인됐던 권 여사와 건호, 정연 씨는 마치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함께 고통을 나눠야 할 가족으로 느끼게 됩니다.

숙연해진 사회 앞에, 이성을 찾으라며 '피의자 노무현의 죽음'으로 묘사하는 일부 언론들은 살아있는 권력과 함께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숨죽이게 됩니다. 이 와중에 질서유지라는 턱없는 명분을 내세워 대형 버스와 전경의 장벽을 쌓아 올린 권력에 대해 비판과 함께 야유를 보내게 됩니다. "무엇이 그리도 두렵냐?"고....

(3) 소통...

이런 일련의 과정을 어떤 이는 '희로애락'을 공유하고자 하는 한국인의 전통적 의식세계와 연결 짓기도 합니다. 정에 약한 민족이라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겪게 되는 사회 구성원의 원자화와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MB정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좌절되면서 느끼게 되는 배신감이 광장 문화와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과거에 대한 향수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짓고 저항했던 세대들이 4-50대 장년층이 되면서 오히려 박정희 시대의 개발 독재와 가부장적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을 종국적으로 성공으로 '마무리' 짓게 한 주역으로 흔히 넥타이 부대를 꼽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을 구성하면서 사회 질서 유지의 기둥 역할을 하면서도 의식적으로는 사회 변혁의 정당성에 공감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데 따른 부채의식을 지니고 사는 이 넥타이 부대들이 정권에 반기를 든 항쟁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승부는 끝이 났습니다. '기회주의자들의 원조'로 폄하하건 아니면, '변혁을 핵폭탄을 터뜨린 트리거(방아쇠)'로 칭송하건 분명, 그들이 어디 섰는가에 따라 승부는 갈렸고, 결국 '국가'가 '시민사회'에 무릎 꿇게 됐습니다.

지난해 촛불 정국 당시, '국가'는 유모차 부대를 '동원된' 시민사회로 오인했습니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을 아무 생각 없이 놀러 나왔다가 데모대에 휩쓸린 '무지자'로 규정지으면서 며칠 지나면 저항세력과 분리할 수 있을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소통'하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간신히 상황을 수습했던 '국가'는 시민사회를 또 다시 원자화하는 데만 주력했습니다. 경제 난국 돌파를 이유로 내걸어 힘겨운 달리기에 동참을 호소했을 뿐, 오랜 달리기에 지친 국민들의 고통을 함께 이해하고 고달픔을 달래려는 노력은 게을리 했습니다.        

(4) 광장...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년, 20%대의 지지율조차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바보 노무현을 지지해 대통령까지 만들어줬던 서민과 소외자, 그리고 젊은이들마저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습니다. 각종 개혁에 의한 피로에도 내 삶이 나아지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이 대통령을 지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뛰어넘어 자수성가한 이 대통령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소통에 너무나도 서툴렀습니다. 몽매한 국민을 이끌 지도자로 자리 매김하느라 국민과 나란히 함께 서서 가야한다는 간단한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왜 지금 조문에 나선 시민들의 눈에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의 공과'는 보이지 않고, 세 번이나 지역감정 극복을 위해 애쓴 '바보 노무현'과 퇴임 이후 밀짚모자를 쓰고 손녀딸을 자전거에 태우고 가는 '평민 노무현'만이 가득합니다. 시민들이 원하는 모습에 필(FEEL)이 꽂힙니다. 다른 모든 추한 모습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광장에 모여 그들은 그런 필(FEEL)을 나눕니다. 하나가 됩니다. 위안을 느낍니다. 분노를 공유합니다.

월드컵 응원열기로 국민을 하나로 묶었던 '응원의 광장'은 쇠고기 정국 때 '소통과 저항의 광장'이 됐고, 이제는 '슬픔과 분노의 광장'이 됐습니다. 영결식 당일 날 가득 메웠던 인파에서 지금은 만 명 정도, 아니 그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해서, '상황 클리어'를 외치는 우를 범해선 안 됩니다. 국민들이 뭘 얘기하려는지 끊임없이 그리고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소통해야 합니다.

(5) 가까운 미래.. 먼 미래..

얼마 있으면 뜨거운 여름과 함께 바캉스 시즌이 다가오고 그 휴가 열풍에 묻혀 노무현은 잊혀 질 것이라며 외면해선 안 될 겁니다. 외형상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조문의 열기는 식어가고 사회는 다시 평소와 같은 템포로 돌아갈 겁니다. 조문의 열기를 다시 지피려는 야권과 시민사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생업의 세계로 되돌아갈 겁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그러하다고 해서 시민사회의 의식마저도 그렇게 될 것으로 착각해선 안 될 겁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민주당 지지도가 급상승했습니다. 지지율을 탈환하려는 여당과 지키려는 야당 간에 전력을 다한 전략 전술 싸움이 벌어질 겁니다.    

이미 한국의 시민사회는 충분히 성숙해 있습니다. 국가의 다양한 이데올로기 기제에 속지 않습니다. 잠시 속았다 해도 다시 깨달아 더 큰 분노를 느낍니다. 여권은 당장은 납작 엎드려 있다가 적절한 시점에 적당히 뭉개고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만 찾으려고 애써선 안 될 겁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국민이 무엇에 목말라 하는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목마름을 시원한 냉수를 달래줄 수 없다면 적어도 그들과 함께 목말라 하는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반면, 야권은 그런 시민들의 갈증을 이용할 경우 저항과 역효과를 맞게 될 겁니다.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시민들이 정치권에 스스로 이용당한다고 느낄 때 더 큰 역풍을 맞게 될 겁니다. 지금부터 한 달, 특히 6월 국회를 둘러싼 여야의 힘겨루기를 지켜보는 시민사회의 평가를 냉정히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은 말하고 싶어 합니다.

국민은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국민은 함께 하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그래서 국민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편집자주] 10년전 '출동 코끼리 기자' 또 '박병일 기자의 현장출동!' 등에서 맹렬하고 거침없는 시사고발 취재로 이름을 날렸던 박병일 기자는 현재 차장이 되어 정치부 여당팀의 현장팀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제는 연륜까지 더해진 깊이있는 정치 기사가 기대됩니다.

최종편집 : 2009-05-31 14:56 박병일 기자 cokkiri@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