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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일 폴리시 어플리케 네일 스티커

네일 폴리시 어플리케라고 부르는 매니큐어 필름이 네일시장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메니큐어를 말리는데 시간을 절약한 네일 스티커라 불리는 것이다. 플라스틱 재질을 사용하지 않는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젤 폴리시 시장이 확대되면서 메니큐어 시장을 대신하고 있다. 매니큐어는 상온에서 자연방치로 말리지만 젤은 UV나 LED 램프로 응고시킨다. 시간도 10초 이내면 간단히 말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네일 폴리시 어플리케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상되지 않지만 다양한 니즈를 가진 뷰티 네일 아트 마니아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사로된다. 시간과 비용적 측면이 한국 젤 아트 시장에 비해 경쟁력이 다소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네일 스티커로 전 세계 시장의 85% MS를 가지고 있는 회사를 운영하는 인코코(박화영 대표)에 대한 기사가 있어 정보를 공유하고자 한다.


1987년 4월, 스물아홉 살 청년 박화영은 뉴욕 맨하튼 32번가에서 86번가로 가는 버스에 타고 있었다. 한양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왔던 그가 성악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의 눈에 택시 뒷자리에 탄 백인 여성이 손톱에 부지런히 매니큐어를 칠하는 모습이 보였다. 차가 멈춰있을 때는 칠하고, 달릴 때는 후후 불어 말렸다. 박화영은 생각했다. "매니큐어를 말리는 시간을 없앨 수 있다면 굉장히 인기를 끌겠는데…."


박화영(55)은 현재 '매니큐어 필름'으로 연 매출 1억달러(약 1090억원)를 올리는 기업 '인코코'의 대표다. '매니큐어 필름'이란 매니큐어와 똑같은 원료로 만들었으나 끈적한 액체가 아닌 얇은 막(膜)으로 손톱에 붙이는 상품이다. 인코코가 있는 미국 뉴저지주 클리프턴으로 찾아간 건 지난달 28일이었다. 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겨낸 천 가지 고생과 만 가지 괴로움에 대해 듣기 위해서였다.

―'매니큐어 필름'이 '네일 스티커'와 비슷한 겁니까.

"네일 스티커는 플라스틱이죠. 그건 말 그대로 스티커에 무늬와 색깔을 인쇄해서 자른 거예요. 우리 제품은 '네일 폴리시 어플리케(Nail polish applique)'라고 부르는데, 매니큐어와 똑같은 재료로 만듭니다. 네일 스티커는 붙였다 떼어내지만, 매니큐어 필름은 아세톤으로 지워야 합니다. 당연히 매니큐어와 똑같은 냄새 나지요. '짝퉁 천국'인 중국에서 아직도 짝퉁을 못 만들어요. 불법으로 베끼고 싶어도 기술이 없어서 안 돼요."

―그럼 이 제품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코코만 갖고 있나요.

"맞아요. 유명 브랜드로 나오는 제품을 모두 우리가 납품합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인코코 이름으로 팔리고 있죠. 전 세계 붙이는 손톱 화장품 시장의 85%를 우리가 점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머지 15%는 한국과 중국서 만드는 네일 스티커가 차지하죠."

그가 제품 하나를 뜯어서 손톱에 붙이는 법을 시연해보였다. 제품 하나에 필름 8개가 있는데 각각의 필름이 위·아래 사이즈가 조금씩 달랐다. 결국 총 16가지 사이즈 가운데에서 자신의 손톱에 맞는 사이즈를 고를 수 있다. 이것을 손톱에 붙이고 손톱 끝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손쉽게 나머지 필름이 똑 떨어졌다. 필름에서는 매니큐어 특유의 솔벤트 냄새가 강하게 났다. 그는 "솔벤트를 100% 말리는 기술은 쉬운데 이것은 소량만 남기고 말려야 해서 어려운 기술"이라고 했다.

―성악 공부하다가 어떻게 네일 사업을 하게 됐습니까.

"시카고 음대에서 석사를 하고 뉴욕 메네스 음대에서 프로페셔널 과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과연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될 수 있을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교포인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가정을 책임질 만한 일을 찾다가 이 일을 하게 된 거죠."

―처음엔 자전거숍을 했다면서요.

"그때 나에게 경영 수완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가게가 너무 작아 물건이 없으니까 매출이 오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른 동네 자전거숍을 찾아가서 '내가 물건을 대신 팔아줄 테니 수수료를 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큰 가게 다섯 군데랑 계약을 하고 나는 물건 없이 카탈로그로 자전거를 팔았어요. 그때 마침 BMX(묘기자전거)가 크게 유행을 했는데 우리 동네 아이 5명에게 티셔츠를 맞춰주고 묘기 팀을 만들었어요. 걔들이 맨날 우리 가게 앞에서 자전거 쇼를 하니까 항상 가게 앞이 사람들로 붐볐어요. 로컬 TV에도 출연하고요."

―그래서 돈을 벌었나요.

"그 동네 아이들이 고장난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많이 다쳤는데, 제가 시장(市長)을 찾아갔어요. '자전거를 1년에 한 번 검사해서 합격 스티커를 붙여주자'고 했죠. 좋은 생각이라고 채택이 됐고 제가 경찰과 함께 동네 모든 자전거를 검사했어요. 수많은 자전거가 불합격됐고, 그 자전거들이 모두 우리 가게로 몰려들었어요. 고쳐도 고쳐도 끝없이 자전거들이 밀려들었어요. 자전거숍 연 첫해에 매출을 25만달러(약 2억7000만원) 올릴 정도였으니까요."

―손톱에는 언제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1980년대 말에 유대인들이 뉴욕에서 네일숍을 시작했어요. 그때 손톱 칠해주고 100달러씩 받을 때예요. 손재주 있는 한인들이 그리로 진출한 거예요. 그때 맨해튼 네일 살롱에 가보면 재미있는 게, 한쪽에서는 손톱을 칠해주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손톱을 말리고 있더라고요. 꼬박 30분을 아무것도 못하고 손톱을 말려야 하는 거죠. 저것 말리는 시간을 없앨 수는 없을까, 생각하다가 말려서 스티커처럼 붙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거죠."

그는 매니큐어 한 통을 사다가 종이 위에 붓고 나무젓가락으로 펴보았다. 이것을 말리니까 필름 형태가 되긴 했는데 뗄 수 없었다. 이번엔 스티커에 쓰이는 실리콘 종이 위에 붓고 말렸다. 그랬더니 고스란히 떨어졌다. 그가 발명한 최초의 '매니큐어 필름'이었다. 신이 난 그는 여자들이 손톱에 하듯이 실리콘 종이 위에 매니큐어 베이스를 먼저 바르고, 컬러를 입힌 뒤 마지막으로 클리어 코트(광택제)까지 발랐다. 그리고 말린 뒤 손톱 모양으로 잘라서 붙이니 딱 하고 달라붙었다.

―그때 기분이 대단했겠네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았어요. 매니큐어 시장이 전 세계 10조원인데 미국과 일본이 5조원이에요. 그런데 다들 말리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

―그게 1987년인데 왜 2005년이 돼서야 상품이 나왔습니까.

"대량생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시제품은 만들 수 있는데 시장에서 원하는 만큼 만들어낼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걸 찾아내는 데 18년이 걸린 겁니다."

그가 자전거숍을 하면서 발명했던 매니큐어 필름은 에디슨 이전에 발명된 전구와 같았다. 누구나 하나는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100만개를 생산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전거숍으로 번 돈으로 동네 미용실을 인수해 두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미용실은 돈 벌기 위한 게 아니라 순전히 미용 산업을 배우기 위해서 운영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2년 반 동안 운영한 자전거숍과 미용실을 접은 그는 1990년 맨해튼에 작은 사무실을 내고 '인코코' 간판을 붙였다. 그 이름은 'Innovative Cosmetic Concept(혁신적인 미용 콘셉트)'의 약자였다.

―본격적으로 미용 산업에 뛰어들었군요.

"뉴욕 브로드웨이에 미용 도매상들이 모여있었어요. 거기 가서 이걸 보여주면 다들 좋아했어요. 그런데 한 유대인이 저한테 충고하기를 '그런 데서 런칭하면 그 제품은 fad(잠깐 반짝하다 사라지는 물건)이 되고 마니까 무조건 메인스트림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제가 메인스트림에 진출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낙담이 그를 좌절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 메인스트림을 맨몸으로 뚫기로 결심하고 연매출 80억달러 화장품 회사 에이본(Avon)을 찾아갔다. 주변에서는 "아모레 화장품도 미국에서는 한인 수퍼에서만 팔리는데 네가 무슨 메인스트림이냐"고 타박했다.

―에이본에서 만나주던가요.

"1층에서 거절당했죠. 다행히 매니큐어 담당 바이어의 이름은 알아냈어요. 샘플을 박스에 포장하고 박스 바깥에 편지를 썼어요. 'This is real nail polish. You must open this(진짜 매니큐어입니다. 반드시 열어봐주세요).' 뜯지도 않고 버릴까 봐 그랬죠. 그때 샘플은 한국에서 강철 코팅 사업을 하던 형의 공장 한쪽에서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전화가 온 거예요. 1주일 뒤에 제품을 갖고 오래요."

박화영은 처음 맛본 프레젠테이션에서 참패했다. 성분이나 포장법, 배송 방법에 대한 질문을 단 하나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단한 것을 발명했다는 생각에 도취됐지만 어떻게 팔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몇 개를 원하느냐"고 묻자 에이본은 "첫 주문이 100만개이고 잘 팔리면 매달 100만개씩 주문할 것"이라고 했다.

―엄청난 양이군요.

"그게 바로 미국 매스 마켓(대형 시장)의 파워예요. 그렇지만 나는 그 물량을 댈 수가 없었어요. 그때 내가 설계한 기계로는 하루 종일 돌려봐야 2000개 정도밖에 만들 수 없었거든요. 이노베이션 때문에 미국 메인스트림에 진입했지만 프로세스 때문에 쫓겨나게 된 거죠. 그랬더니 에이본에서 '공장을 한번 보자, 조인트 벤처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그 회사 사람 둘을 데리고 한국에 갔지요. 그들이 제 초라한 시설을 보더니 '너무 초보적이어서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 것 같다'며 합작회사를 포기했어요. 콘셉트밖에 없는 회사라는 거였죠."

1차 시도에서 좌절한 박화영은 매니큐어 필름을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는 "음악을 포기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미용산업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든다는 비전을 갖고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다시 희망을 가졌습니까.

"우연히 자동화기계 컨벤션이 시카고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박람회 사흘 동안 정말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고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그렇게 94년부터 3년간 기계 쪽으로 굉장히 많은 공부를 했고 아주 중요한 진전을 봤어요. 내가 바보였다는 사실도 깨달았죠.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데 안 되는 걸 붙잡고 있었던 거예요. 상상력이 없었던 거죠. 창조의 첫 단계가 상상이에요. 경우의 수가 무한대인데 어떻게 모든 걸 다 해보겠어요. 상상력으로 경우의 수를 추려내야죠. 스티브 잡스 역시 그런 상상력과 직관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추려낸 다음에 아이폰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 낸 거죠."

외판원으로 생계를 이으며 한편으로는 '매니큐어 필름 대량생산'을 꿈꾸던 그는 세일즈를 하면서 자신의 영업 능력도 발견했다. 그가 336달러(약 37만원)짜리 공기청정기를 팔아 큰돈을 번 이야기를 들려줬다.

"공기청정기를 한 대 사서 완전히 분해를 한 뒤 이것이 왜 좋은 기계인지 철저히 분석했어요. 오존은 매우 과격한 산소여서 안정을 찾으려고 다른 산소를 찾아다니고, 그러다 보니 악취를 찾아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산화시킨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판매를 했죠. 그게 다단계 판매회사 제품이었는데, 6개월 뒤에 내 밑에 1400명이 모였어요. 가만히 있어도 한 달에 4만달러(약 4400만원)가 들어왔죠."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280㎡(약 85평)짜리 공장을 얻었다. 수년간 자동화기계 공부를 한 지식을 바탕으로 직접 기계를 설계해 그 공장에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용접과 밀링, 선반, 프레스 기술을 독학으로 배웠다. 공구매장에 가서 용접기와 철판, 철판 자르는 기계들을 사와 비디오를 보며 기계 프레임을 만들었다. 물론 모터나 컨트롤러 같은 핵심 부품은 사다가 붙였다. 그러나 결과는 또 실패였다. 예전 하루 2000개 생산에서 3000개로 늘었을 뿐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에게 가르치는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탈리아인 성악 교수가 "당신은 성악가는 포기했지만 성악 강사로 클 수 있다"며 성악 가르치는 법을 가르쳐줬다.

―세계무대는 포기했지만 제자를 키웠겠군요.

"현재 메트로폴리탄에서 활약하고 있는 캐서린 김(김지현)과 원태헌, 뉴욕에서 유명한 최경순을 제가 가르쳤어요. 이번엔 음악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저를 찾아왔어요. '어떻게 가르치기에 당신 제자들이 그렇게 다들 잘하느냐'며 맨해튼에 성악 스튜디오를 내자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에게는 매니큐어 필름이란 프로젝트가 있었기 때문에 그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기계 용접과 성악 교습, 공기청정기 세일즈까지, 이건 뭐, 르네상스맨이 따로 없었다"며 웃었다.

그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기보다 열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시카고 음대 시절 처음 택한 아르바이트는 중국음식점 버스보이(상 치우는 사람)였다. 그는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사흘 만에 해고됐는데, 무작정 그 다음 날도 출근했다.

"매니저가 당장 나가라고 하는데도 묵묵히 돈 안 받고 일했어요. 그렇게 일하던 18일째 어떤 백인 가족이 딸 생일파티를 우리 식당에서 했어요. 종업원들이 케이크에 불을 붙여 가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줘야 했는데, 제가 나서서 '내가 노래를 해도 되겠느냐'고 했죠.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그러라'고 하기에 생일 축하 노래를 오페라처럼 멋지게 불렀죠. 식당 전체가 박수와 환호로 난리가 났고 제 손엔 팁 100달러가 쥐여졌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불러서 '네 재주를 몰라봤다. 내일부터는 버스보이가 아니라 웨이터다' 하면서 밀린 일당 540달러를 주는 거예요. 저는 '고맙지만 오늘 그만두겠다'고 말했어요. 저는 돈이 아니라 저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었거든요."

박화영이 화학원료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99년이었다. 결국 기계나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매니큐어 원료가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매니큐어 원료회사에서 일하다 은퇴한 인물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1985년 미국 최대 화장품회사 레블론과 테이프회사 3M이 자신과 똑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다 개발비만 100만달러 쓰고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2003년 드디어 박화영은 매니큐어 필름을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때쯤 최악의 자금난이 닥쳤다. 공장 임대료 3개월치 1만달러를 내지 못해 압류딱지가 기계에 붙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으니 계약을 하면 되잖습니까.

"그래서 레블론을 찾아갔는데 개발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다며 거절하더군요. 이제껏 만났던 모든 사람 명함을 늘어놓고 하나씩 살펴봤어요. 나에게 호의적이던 변호사가 있어서 찾아갔더니 로레알 변호사를 소개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레알과 연결이 됐죠."

―로레알에 간 게 언제입니까.

"2003년 8월이었어요. 로레알에서도 제품을 무척 좋아했어요. 계속 회의는 하는데 계약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경매날짜가 12월 28일로 잡혔어요. 나는 로레알에다가 하드볼(승부수)을 쳤죠. 올해 내로 계약 안 하면 다른 회사랑 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랬더니 로레알에서 마지막으로 공장을 보자는 거예요. 압류딱지 붙은 공장을 어떻게 보여줘요.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그래서 공장 경비원에게 한 번만 살려달라고 살살 설득해서 다들 퇴근한 금요일 오후 4시에 공장을 보여줬어요. 압류딱지는 꽃으로 덮었어요. 그렇게 로레알과 12월 20일에 계약하고 26일에 16만달러가 입금됐어요. 정말 그 해는 내 생애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로레알과는 착착 진행이 됐나요.

"로레알 본사 사장이 파리로 초청을 했어요.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자 그는 나를 내 인생 최고의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그해 5월 칸 영화제에 우리 부부를 초청했어요. 로레알이 칸 영화제 메인 스폰서이거든요. 칸 최고의 호텔 스위트룸에서 저녁마다 할리우드 스타들과 파티를 하고 우리한테 리무진과 보트가 제공됐죠. 그때 한국영화 '올드보이'가 칸에 왔는데 제가 로레알 사장과 레드 카펫에 오르니까 한국 사람들이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눈으로 쳐다봤던 게 기억납니다."

―로레알과 납품계약을 하진 않았죠.

"2003년에 한 계약은 제품과 시장성을 6개월간 평가하겠다는 계약이었어요. 6개월이 지난 뒤 마지막 회의를 하는데 그쪽 사람이 '평가 결과는 좋지만 우리는 당신 제품을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어요. 너무나 놀랐지만 표시를 내기 싫어서 '그쪽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잠깐만' 하면서 '우리는 제품이 아니라 당신 회사를 사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1000만달러를 주고 나를 사장으로 고용해 월급 50만달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고마운 제안이군요' 하면서 웃었어요."

―6개월 전만 해도 경매에 넘어가려던 회사인데 무척 떨렸겠네요.

"떨렸죠. 그렇지만 저는 '나는 회사를 팔 생각이 없다'고 말했어요. 다들 엄청나게 놀랐어요. 제 고문변호사도 굉장히 놀라더군요."

―왜 팔지 않았습니까.

"10년 넘게 키워온 회사를 제 손으로 키워보고 싶었습니다. 로레알이 그렇게 제안했다는 건 성장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뜻이기도 했고요."

이후 박화영은 시제품을 만들어 제일 처음 찾아갔던 에이본을 다시 찾아갔다. 당시 한국의 초라한 공장까지 동행했던 사람은 이제 선임부회장이 돼있었다. 그는 "맙소사, 당신 아직도 이걸 만들고 있었단 말이야?"라며 놀라더니 "당장 우리 회사와 계약하자"고 했다.

2004년 12월 에이본과 첫 납품계약을 맺은 인코코는 이듬해 8월 매니큐어 필름 100만개를 만들어 납품했다. 이것이 1주일 만에 매진됐고 그로부터 1년간 총 10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로레알이 제시했던 금액을 1년 만에 다 벌어들인 것이다. 인코코의 마진율은 60%가량으로, 현재 연매출 1억달러가 다른 산업의 10억달러에 견줄 만한 규모다. 에이본 상표로 런칭한 제품이 크게 히트하자 프랑스의 세포라, 미국의 샐리 핸슨과 O.P.I, 영국의 리멜 등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동시에 한국과 중국에서 짝퉁 스티커들도 엄청나게 쏟아져나왔다.

―지금 회사 가치는 얼마 정도 됩니까.

"지금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가치는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연매출의 4배에서 6배가량을 회사가치로 봅니다. 우리는 '인코코'라는 이름이 덜 알려져있는데, 작년 일본에 인코코 이름으로 진출했으니까 가치 올라가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현재 일본에서는 작은 매대(賣臺) 한 곳의 하루 매출이 1만달러에 이를 만큼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다.

―성공 비결을 묻는 사람이 많겠죠.

"저는 집착하지 말고 집념을 가지라고 해요. 집착은 다른 사람을 상처입혀요. 그렇지만 집념과 열정이 만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거죠. 그리고 나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반드시 있어야 해요. 한국 가수 싸이와 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박진영은 미국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미국 짝퉁 시장을 잘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비나 원더걸스가 뭘 해도 임팩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싸이는 통했어요. 오리지널리티가 있기 때문이죠."

레블론에서 20년간 일하다 인코코로 옮겨온 마케팅디렉터 대런 스칼라는 "박화영은 또 한명의 찰스 렙슨이며 역사책에 기록될 인물"이라고 말했다. 찰스 렙슨(1906~75)은 컬러 매니큐어를 발명한 레블론의 창업자다. 그는 담배 피우는 여성의 손을 보면서 매니큐어를 생각해냈다. 역사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 발화(發火)돼, 집념과 열정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한국인 박화영이 입증하고 있었다.



기사참조 : 조선닷컴 한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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